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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60] 고개 숙일수록 인정받고 사람 몰리는 것…비즈니스와 마찬가지로 정치에도 먹혀

지난 2008년 10월경 시장 선거를 불과 한 달여 남겨두고 나는 상대편 후보인 베테랑 정치인 크리스티나 셰이 후보와 1 2위를 다투는 숨막히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어바인 상공회의소가 시의원과 시장 후보 12명을 모두 초청하여 토론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공화당의 한 후보가 "여기 모인 후보들 중에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고 폭탄 발언을 했다. 우리 민주당에서 시의원 후보로 나온 토드 갤린저 변호사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갤린저 후보는 백인이면서 얼마 전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슬람 커뮤니티의 인권 문제를 주로 담당해 온 인권 변호사였다. 며칠 후 이 발언이 지역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상대 진영은 나를 포함한 민주당 후보들을 한데 묶어 '이슬람 테러리스트 후원자들'이라고 매도했다. 하지만 이 전략은 먹히지 않았다. 유권자들이 네거티브 전략의 의도를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소동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고 우리 팀은 선거에서 승리했다. 장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제품과 서비스로 승부를 걸어야지 다른 경쟁업소를 비방하고 다른 제품을 비하하는 전략으로는 소비자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네거티브 전략은 상대편을 흠집내고 그 반대급부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소비자 유권자의 판단을 잠시 흐리게는 할 수 있지만 결코 진정한 승리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시간은 더 걸릴지 모르지만 결국 정의와 진실이 승리한다는 진리를 나는 굳게 믿는다. 정직과 성실은 겸손할 때 더 빛난다 나를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인 동시에 가장 신랄한 비판자이기도 한 아내가 내게 해준 가장 큰 칭찬은 '사람이 투명하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하나도 다르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한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했다. 그 장점으로 그렇게 어려운 선거 캠페인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눈빛과 어투만 봐도 금세 드러나는 정직함과 진실함 그런 투명성이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했다는 말이다. 과분한 칭찬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진심으로 남을 대하기 위해 노력해 온 것만큼은 사실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정직과 성실이 다른 어떤 가치보다 더 앞선다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정직과 성실은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먼저 알아본다. 고객이 먼저 알아보고 상사가 알아보며 동료들이 알아본다. 유권자는 표로 인정해 준다. 나는 세일즈왕을 차지할 때마다 선거에서 승리를 거둘 때마다 그 점을 거듭 확인했다. 정직과 성실은 겸손의 마음을 가질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아무리 실적이 좋아도 그것을 제 잘난 덕으로 돌리며 우쭐해하는 순간 서서히 추락의 손길이 다가온다. 서킷시티에서 20대 나이에 아시아계 최초로 매니저의 자리에 올라 하는 일마다 좋은 성과를 거두자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만 교만해졌고 그것이 시련의 씨앗이 되었다. 재입사를 권유받았을 때 나는 자세를 낮추었고 더 열심히 뛰었다. 그 결실은 어김없이 그리고 정직하게 돌아왔다. 치열한 선거전에서도 고개를 숙이면 숙일수록 유권자들이 내 편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겸손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더 인정해 주었고 나를 더욱 높여주었다. 신발을 팔 때도 겸손의 힘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우리 가게의 충성 고객으로 변화시켰다. 제품과 서비스를 팔면서 고객 위에 군림하고 고객을 무시하는 가게는 곧 문을 닫게 되어 있다. 주민들을 가볍게 여기고 권위만 내세우는 정치인의 생명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고객은 항상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주인의 위상이 흔들린다고 생각될 때 그들은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다. 이것은 장사에서나 정치에서나 어김없이 적용되는 원칙이다. 낮춘 만큼 얻고 낮춘 만큼 높아지고 낮춘 만큼 승리한다는 것 이것이 내가 세일즈에서 배운 정치학의 정석이다. 〈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2-21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59] 좋아하는 인물과 공약에 투표해야 개운…A가 싫어서 B에 한표주면 이겨도 찝찝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물건을 팔 때의 기본은 고객에게 잘 설명하고 이해시켜 물건에 대한 확신이 들게 하는 것이다. 제품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고 그 물건이 돈을 치르고 살 만하다는 믿음이 생기면 고객은 자연스럽게 지갑을 연다. 고객의 믿음은 파는 사람의 됨됨이가 좌우한다. 인간인 이상 상대방이 풍기는 인품에 어쩔 수 없이 끌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연극을 잘해도 인품을 꾸밀 수는 없다. 인품은 말과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고객이 매장을 돌기만 하고 구매를 망설이는 이유는 그 물건을 샀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이다. 가격이 비싸고 싸고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이 물건을 사서 얼마만한 부가가치를 누릴 수 있느냐가 초점이다. 갈등하는 고객의 믿음을 얻는 세일즈맨은 절대로 고객이 주저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고객의 마음을 읽고 고객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조언하기 때문이다. 고객은 그것을 직감으로 안다. 그래서 진실한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전자제품 매장에서 무엇을 살까 고민하는 고객과 신발을 이것저것 살펴보면서 결심하지 못하는 고객에게 단 몇 마디의 조언으로 기꺼이 상품을 구입하도록 유도한 경험이 셀 수 없이 많 다. 정치라고 예외는 아니다.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은 항상 누구에게 표를 던질지 고심한다. 상당수의 유권자가 이 후보 저 후보의 면면을 재면서 막판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바로 이 부동표가 선거의 당락을 결정한다. 출마자들이 한 표라도 더 얻으려고 막판까지 사력을 다하는 이유는 이런 갈등하는 표심을 끌어당겨야 하기 때문이다. 고민하는 구매자 갈등하는 유권자가 결정을 내리도록 해주는 것이 설득의 힘이다. 설득은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나는 고객과 유권자들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가급적 쉽고 명쾌한 단어를 써서 깊은 인상을 남기도록 애쓴다. 선거 캠페인을 할 때나 연설을 할 때 "수키 당신이 하는 말은 귀에 쏙쏙 들어와요. 당신은 하고자 하는 말을 참 간단하게 인상적으로 전달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나의 영어 구사력이 완벽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좋은 평가를 듣는 것은 뚜렷하고 확신에 찬 메시지 전달 때문이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언변이 좋아도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데 실패한다면 고객과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렵다. 설득의 커뮤니케이션은 지식이 뒷받침되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제품에 대해서 주민들의 민원에 대해서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일즈맨이나 정치인이나 부단히 공부해야 한다.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다. 통계적으로 보아도 상품 지식 때문에 물건을 사는 경우는 약 20퍼센트이고 나머지 80퍼센트는 '인간적 요소'(human factor)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설득이란 정성과 지식 그리고 인간관계로 상대방을 승복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남을 설득할 수 있다면 사업이건 정치건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네거티브 전략은 쓰레기통에 버려라 물건이 좋아서 사고 후보가 마음에 들어서 표를 던져야 끝이 좋은 법이다. 다른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업소가 싫어서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결과는 늘 뒷맛이 개운치 않다. 선거에서도 정말 좋아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졌을 때는 만족스럽지만 이 후보는 이래서 싫고 저 후보는 저래서 싫어 마지못해 표를 던졌다면 설령 자기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투표자의 만족도는 낮아진다. 나는 세 차례의 선거를 치르면서 숱한 네거티브 캠페인에 시달렸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상대편에게 네거티브 전략으로 맞서지 않았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 나는 어떻게 일하겠다'는 포지티브 캠페인만으로 유권자들을 움직였다. 내가 이룬 성과를 진솔하게 알리는 데 주력하는 것 그것이 내 선거 캠페인의 핵심이었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2-16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58] 순수한 봉사는 유권자도 알아준다는것, 20년 이상 소매 경험으로 터득한 진리

세일즈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나는 내가 가진 잠재력이 무엇인지 몰랐고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이를 극복해 나가면서 '나도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스스로 쳐놓은 장벽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서킷시티는 또 리더십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훈련시켜 주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나를 따르게 하려면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리더십은 자발적인 참여 의식 주인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리더는 소통하고 화합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권위는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과 열정에서 나온다. 세일즈가 고객에게 물건을 파는 행위라면 정치는 유권자에게 신용을 파는 행위이다. 세일즈맨이 고객을 설득하고 믿음을 얻어 물건을 파는 것처럼 정치인도 유권자에게 자신의 능력과 봉사 정신을 세일즈하고 그들이 구매투표토록 한다는 점에서 세일즈와 정치는 그다지 다를 게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세일즈 경력은 시의원과 시장으로서 정치적 성취를 이루고 주민들을 만족시키는 서비스 정신을 길러준 밑거름인 동시에 준비 기간이었던 셈이다. 진정성 감동과 신뢰의 출발점 신발 장사를 할 때 손님이 원하는 25달러짜리 발레 슈즈를 구해주기 위해 60여 마일 떨어진 다른 매장까지 찾아간 이야기는 앞에서 소개했다. 그 이야기를 언젠가 한인 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었다. 신문의 '비즈니스 일기'라는 코너에 '손님이 원하는 신발 찾아 60마일 운전'이라는 제목으로 글이 실렸는데 당시 내 글을 읽고 많은 분이 전화를 걸어주셨다. 어떤 분은 "당신이 그런 각오로 하니까 못 해낼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해도 잘할 사람입니다"라며 격려해 주었고 나의 지독한 면모에 놀랐다는 사람도 많았다. 사실 장삿속으로 보면 다른 가게에 신발을 구하러 가느라 기름값 들여가며 3시간을 운전하는 법석을 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 엄마의 안타까운 마음을 생각하니 꼭 내 일처럼 여겨졌고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신발을 구해주고 싶었다. 그 후로 이 고객이 몇 곱절로 되갚아주었으니 결국 손해 본 장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이렇게 글을 맺었다. "조그만 정성이 상대방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고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미래를 안겨준다는 것이 20년 이상 소매 경험으로 터득한 진리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시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 내 이름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2만여 가구를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나를 알렸다. 주민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공직에 나가면 반드시 당신의 입장에서 정책을 만들어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는 약속을 지켰다. 거의가 백인 일색인 어바인 시에서 무명의 한국 이민자가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 시의원 시장으로 일하게 된 것은 주민들이 나의 눈빛과 가슴에서 나온 말의 진정성을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마치 자신의 일처럼 분노하고 기뻐하고 슬퍼했던 나의 진심을 그들은 알아주었다. 내가 정치적인 명성이나 위세를 떨치고 싶어서 정치적 '기교'를 부리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면 그들은 결코 나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2-15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57] 세일즈맨 시절 배운 삶의 지혜…내 인생을 관통하는 교훈으로

아니나 다를까 무서운 속도로 매출이 늘었다. 역시 수키 캥의 실력은 쫓아올 사람이 없다 우연이라는 말은 수키 캥의 사전에 없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셈이었다. 나는 회사에 승진 신청을 냈다. 오랫동안의 세일즈를 통해 상당한 노하우를 터득했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교육 담당 이사 자리를 신청했다. 그동안의 실적으로 봤을 때 당연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탈락이었다. 실망이었다. 명예의 전당에 두 번이나 이름이 오를 정도로 성과를 냈지만 승진은 또 다른 문제였다. '유리천장'(glass ceiling 보이지 않는 차별을 뜻하는 말)이 나를 가로막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백인이었다면 부사장이나 지역 총괄 매니저로 승진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서글펐다. 여기가 한계일까?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대로 갈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신발 가게는 쉬는 날에 한 번씩 들러 수금이나 주문을 체크하는 정도로도 그럭저럭 잘 운영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회사에 다니며 따로 사업체를 운영하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회사에서도 눈총을 주거나 견제하지 않는다. 도리어 능력 있다며 인정해 주고 부러워한다. 한국에서라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신발 가게가 잘 굴러가니 회사를 그만두어도 먹고 사는 데 당장의 걱정은 없었다. 나는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992년 4.29 LA폭동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비 심리가 극도로 위축된 데다가 사장도 실적 악화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사장은 왜 내가 사직을 결심했는지 이해한다 붙잡지 않을 테니 그동안 내가 이루어놓은 사업체를 잘 운영해 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키 당신은 무엇을 해도 대단한 인물이 될 거요."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 직원들과 악수라도 하며 석별의 정을 나눌 셈이었다. 매장에 들어가니 벌써 다른 매니저가 부임해 있었다. 출근 시간인데 직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새 매니저에게 물었더니 2층에 올라가 보라고 했다.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갑자기 박수가 터지면서 150명의 직원들이 일제히 "수키!"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깜짝 송별 파티였다. 본사 회장도 밤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나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나의 활동 모습이 담긴 각종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나의 과거를 함께 추억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실컷 부려먹기만 하고 비상하려는 내 날개를 꺾는다며 원망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들이 나의 퇴직을 진심으로 애석해하고 나에게 고마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5년의 청춘을 바친 이 회사가 나를 마지막까지 인정해 주고 있구나 나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명예롭게 퇴직한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나의 첫 미국 직장이자 꿈의 무대였고 나의 젊음과 열정을 쏟아부은 서킷시티와 나는 이렇게 감동적으로 작별했다. 나는 여전히 서킷시티를 사랑한다. 그리고 고마움을 느낀다. 서킷시티는 내 인생을 이끌어준 에너지의 원천이었고 값진 경험으로 나를 성장시켜 준 인생의 교육장이었다. 뜨거운 열정과 아름다운 추억 빛나는 성공과 뼈아픈 좌절들 속에서 나를 다져온 15년이 없었다면 나는 그 어려운 시의원 시장 선거에서 악착같이 버틸 수 있는 힘과 끈기를 분출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곳에서 받은 강한 리더십 트레이닝은 어바인 시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준비 과정이었다. ◇ 내가 세일즈에서 배운 것들 서킷시티에서의 세일즈맨과 매니저 생활 그리고 신발 사업을 통해서 터득한 삶의 지혜는 나의 인생을 관통하는 교훈이 되었다. 특히 고객과의 만남에서 터득한 세일즈 정신은 공복으로서의 참된 자세를 깨닫게 해준 나의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기도 하다. 서킷시티에서 나는 '하면 된다'는 도전 정신을 배웠고 성실과 노력은 반드시 보답받는다는 엄연한 진리를 새삼 확인했다. 겸손할수록 더욱 인정받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도 배웠다. <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2-14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56] 결국 입사 13년만에 회사 최고의 상 받아···그 날은 결혼 13주년이어서 더없는 감격

회사에서는 기적 같은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본사에서도 우리의 실적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수키 캥이 어떤 사람이기에 아무도 못 해낸 일을 단시일 내에 이루었을까 어떻게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리 특별한 것은 없었다. 직원들에게 정직과 성실을 요구하고 나를 포함한 매니저들이 스스로 모범을 보였을 뿐이다. 위에서 솔선수범하니 직원들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 최악의 매장이었던 그 매장은 '순이익 전년 대비 36% 증가'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정직과 성실이라는 무기로 이루어낸 멋진 쾌거였다.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나는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정상에 오르면 내려가야 하는 것인가 나의 노력은 본사로부터 응분의 보상을 받았다. 서킷시티 직원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명예의 전당격인 '커널스 클럽'(Colonel's Club)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 상은 10년 이상 계속해서 탁월한 실적으로 회사에 기여한 매니저에게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전국에서 1000명이 모이는 간부회의 만찬 석상에서 상패와 함께 부상으로 2만달러를 받았다. 가슴이 뿌듯했다. 시상식에는 아내도 자리를 함께했다. 마침 그날은 우리의 결혼 13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기쁨이 더했다. 나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이 상은 내 생애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상이며 나를 이렇게 키워준 서킷시티에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모두들 기립 박수로 나를 축하해 주었다. 입사한 지 13년 만에 미국 최대 전자제품 유통 회사에서 주는 대상을 움켜쥐었다. 차별의 시선을 딛고 당당하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미국 생활의 첫 번째 전성기였던 것 같다. 항상 남보다 두 배로 일한다는 각오로 뛰었고 나의 노력은 응분의 보답을 얻었다. 해가 바뀌어 새로운 목표를 잡아야 했다. 작년에 잘한 것 이상으로 목표 액수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산에 오르면 내려가야 하는 것인가. 최고의 실적을 보이며 인정을 받던 나는 그 직후부터 어쩐지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년도에 최선을 다해 올려놓았던 매출이 나의 발목을 잡는 격이었다. 점점 높아지는 목표량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주변의 경쟁 업체들도 우리를 힘들게 했다. 서킷시티와 같은 전자제품 체인인 '굿 가이스'가 우리 매장의 길 건너편에 문을 열었고 또 가까운 곳에 있던 '애드레이스'라는 가전제품 판매점이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요란한 판촉 행사와 함께 경쟁의 포문을 열었다. 한 지역에서 3개의 경쟁 업체가 이전투구하는 양상이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는데 정상에 오른 다음부터 지쳐가는 내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되었다. 목표를 채우기는 점점 어려워졌고 실적은 계속 떨어졌다. 1991년 여름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쳐왔다. 바로 한 해 전에 내가 훈련시켰던 백인이 본사 부사장으로 부임해 온 것이다. 그는 나에게 목표를 채우지 못했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경쟁 업체가 늘어 외부 여건이 급격하게 나빠진 것이 매출 부진의 주원인이었지만 책임은 나에게 돌아왔다. 세일즈 세계는 참으로 냉정하다. 오로지 실적으로만 평가한다. 어제 잘한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늘 더 많은 실적을 올리는 것만이 생존 경쟁에서 이기는 길이다. 나는 라구나힐스 매장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마음에 적잖은 상처를 받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실적을 올려 한 달에 한 곳씩 이겨 나가 내 실력을 다시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실적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팀워크를 강조하고 우리가 힘을 합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용기를 북돋운 결과 직원들의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다. 잘하는 직원과 팀에는 반드시 보상이 돌아가게 하고 분위기를 해치는 무능하고 문제가 있는 직원은 정리했다. 직원들은 "수키와 일하면 일하는 맛이 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2-10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55] 매니저 능력 인정…부실 매장 해결사로, 2년 적자 매장 4개월만에 흑자 만들기도

수키, 당신이 돌아와서 기뻐요! 회사에는 원래 부매니저라는 자리가 없었다.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든 자리였다. 당시 오렌지시 매장의 매니저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나를 그 자리로 보낸 것은 매니저를 견제하고 보완하라는 의미였다. 3개월쯤 지나자 사장은 약속대로 나를 총매니저로 승진시키면서 샌타애나시에 있는 매장으로 발령을 냈다. 매니저가 공석이 된 후 부실덩어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곳이었다. 가보니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조직 관리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고 직원들은 무사안일에 빠져 있었다. 나는 우선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고 제품 반입부터 출고까지 전 과정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문제점을 고쳐 나갔다. 직원들에게는 신상필벌의 원칙을 강조하는 한편 경쟁하면서 화합하도록 유도했다. 자발적으로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자 직원들은 대환영이었다. 6개월 만에 매장 실적은 50% 이상 늘었고 직원들은 신나게 일했다. 직원들은 "수키 당신이 회사로 돌아와서 기쁩니다" "세일즈는 수키의 천직이에요"라며 나를 따라주었다. 매장 운영은 정상으로 돌아갔다. 통쾌했다. 1년 전 회사를 떠날 때 나보다 못해 보이는 친구들이 자꾸 앞질러가는 것을 보면서 상처받았던 자존심도 회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점심을 같이하자고 부르더니 오렌지시의 한 매장이 지난 2년 동안 리더십 부재로 문제투성이 매장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회사에서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능력 있는 매니저를 '특공대'로 보내기로 최종 결정했는데 내가 바로 그 '가장 능력 있는' 매니저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 대신 내 밑에서 일할 매니저들을 내가 직접 선정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사장은 인사권은 물론 모든 업무에 재량권을 줄 테니 마음껏 운영해 보라며 흔쾌히 힘을 실어주었다. 다음 날 나는 곧바로 그곳으로 출근했다. 정직과 성실로 이루어낸 기적 같은 실적 막상 매장에 가서 분위기를 살펴보니 전자제품 매장이 아니라 우범지대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비리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로 총매니저와 부매니저들이 투입되었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비리를 제보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교환원과 세일즈맨 그리고 창고 직원이 서로 짜고 물품을 교묘하게 빼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부피가 크거나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건들은 고객들이 먼저 결제한 후에 '반출' 영수증을 받아 그것을 창고 직원에게 제시하고 물건을 인도받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는데 범인들이 이 틈을 교묘하게 파고든 것이다. 예를 들어 고객을 가장한 범인이 매장에 들러 배터리처럼 값이 별로 안 나가는 물건을 사면 계산대의 공범이 다른 값비싼 물건을 받을 수 있는 영수증을 끊어주는 식이다. 이런 수법으로 몇 년간 물건을 빼돌렸으니 그 손실이 얼마겠는가. 나는 한 달 사이에 창고 직원의 절반 이상을 해고하고 새 직원을 투입했다. 그리고 매장 곳곳을 이 잡듯이 훑으며 비리의 소지를 없애고 불필요한 비용을 줄여 나갔다. 배달 시스템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총매니저는 그저 사무실에서 서류나 결재하는 사람쯤으로 알던 직원들은 내가 하루 종일 매장을 왔다 갔다 하며 살피니까 바짝 긴장했고 자연히 도덕적 해이 현상도 사라졌다. 다달이 매출이 오르면서 직원들의 사기도 충천했다. 물건을 빼돌리는 조직이 한순간에 와해되자 이런저런 내부 비리를 신고하는 직원이 늘어났다. 일련의 개혁 조치가 잇따라 성과를 거두면서 우리 팀이 투입된 지 4개월 만에 재고 조사에서 25만 달러 이상 발생했던 손실이 3000달러의 흑자로 돌아섰다. 2년 동안 난다 긴다 하는 7명의 총매니저가 거쳐갔는데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들이 4개월 만에 정리되는 것을 보고 모두가 나의 역량을 인정해 주었다. 심지어 존경심을 표하는 직원도 있었다. 이직률도 현격히 낮아졌다. 세일즈맨의 이직률은 50퍼센트가 넘는 것이 보통인데 내가 근무하던 매장의 이직률은 10~20%에 그쳤다. 매니저들과의 호흡이 잘 맞았고 직원들도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환상의 팀워크였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2-09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54] 신발가게로 돈은 벌지만 왠지 체면 안서…1년만에 '폼나던' 서키시티에 다시 입사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조금씩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가게를 해서 돈을 더 번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한테 명함 내밀기도 좀 그렇고….' 서킷시티는 미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회사였다. 어디서 누굴 만나더라도 서킷시티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그렇게 큰 회사의 매니저라니 대단하군' 하면서 나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신발 가게를 하면서는 솔직히 체면이 서지 않았다. 돈은 벌지만 일하는 재미와 보람은 줄었다고 할까. '내가 너무 성급하게 사표를 냈나?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는데 잘나가다가 한 번 흔들렸다고 직장을 관둔 건 지나친 만용이 아니었을까.' 후회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말쑥한 차림으로 직원들을 지휘하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렸던 직장 생활이 그리워졌다. 가끔씩 옛 직장 동료나 아는 사람이 가게를 찾아오면 어쩐지 창피하고 기가 죽는 느낌이었다. 부하였던 사람도 괜히 근사해 보이고 '서킷시티 직원'이라는 신분이 멋진 계급장이나 되는 듯 부러웠다. 재입사하면 더 겸손한 태도로 일하세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신발 가게를 연 지 1년쯤 지난 1987년 가을 친하게 지냈던 옛 상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부 본사에서 파견되어 미국 서부 지역 사장을 맡고 있던 제리 로슨이었다. 내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다면서 식사나 한번 하자고 했다. "수키 당신이 사표를 내고 나갈 때 내가 붙잡지 못해서 정말 미안했소. 그때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내가 당신을 지켜줄 수 없는 상황이었소. 우리 다시 시작해 봅시다." 깜짝 놀랐다. 퇴사를 한 지 1년이나 지났는데 다시 돌아와 달라고? 왜 나를 다시 찾았느냐고 물었더니 항상 나를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서킷시티에서 중요한 역할을 잘해낼 것으로 믿는다면서 어떤 자리를 원하는지 제안해 보라고 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표 낸 것을 후회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에 나를 찾은 것이다. 2주 후에 나는 서킷시티의 첫 매장인 오렌지시 매장에 부매니저로 재입사했다. 아내도 가게 주인보다는 큰 직장의 월급쟁이가 내게 더 어울린다며 환영했다. 내 어깨에 힘이 빠져 있던 것을 아내도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신이 회사에서 처음에 너무 잘나가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오만에 빠졌던 것 같아요. 이제 한 번 좌절을 맛보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니만큼 예전보다 더 겸손한 태도로 일하세요." 따끔한 아내의 충고에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입사하자마자 판매왕을 차지하고 승진을 거듭해 20대 나이에 아시아계로서는 유일하게 총매니저가 되었으니 스스로는 겸손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는 새에 오만에 빠져 미움을 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가 불러서 '모셔가는' 형국이었지만 나는 다시 불러준 회사가 오히려 고마웠다. 나는 전보다 더 고개를 숙이고 어깨의 힘을 뺐다. 서킷시티에서의 2막이 시작되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2-08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53] 나의 가장 큰 성취는 잘 자라준 아이들···소홀한 아빠 대신 헌신한 아내가 고마워

하루는 집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큰아이가 네 살 작은아이가 두 살 때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던 아내는 한국에서 친정어머니가 다니러 오신 덕분에 모처럼 외출하고 없었다. 그런데 두 살짜리 딸아이가 할머니 눈을 피해 수영장으로 가서 물속에 있던 뭔가를 집으려다 그만 수영장에 빠지고 말았다. 마침 아들아이가 이것을 보고 "할머니 할머니!" 하고 소리를 질렀다. 장모님이 놀라 달려가셨다. 장모님은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수영장에 뛰어들어 죽을 힘을 다해 손녀를 구해내셨다. 자칫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잘못될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아찔하다. 아내와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왜 수영장 딸린 집을 샀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수영장이 큰 사고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영장 있는 집이 그저 멋져 보인다고 아무 생각 없이 집을 샀으니 참으로 철없는 부부였다. 둘이서 신발 가게를 하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유아원에 보내놓고 아이들 데려올 시간을 깜빡 놓치기가 다반사였다. 아이들은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가게 안에서 놀거나 쇼핑몰의 다른 가게들을 구경하거나 게임을 하면서 기다리곤 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나는 미안하고 고마운 생각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잔정이 없다는 말을 듣는 터에 가장 중요한 성장기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대화를 나누고 정을 붙일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일에 매달려 가정에 소홀한 아빠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 하기는 지금도 아내와 아이들은 "일밖에 모르는 재미없는 아빠"라며 핀잔을 던진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강압적으로 무엇을 시키는 일은 되도록 자제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립심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가르쳤다. 아내는 특히 아이들을 부모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대했고 항상 아이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나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딱딱한 바닥에 꿇어 앉혀 벌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정직과 신용 그리고 성실에 대해 한바탕 교육을 시키곤 했다. 과외 공부는 거의 시킨 적이 없고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도록 도와주었다. 아들 앨런은 운동을 좋아해서 고등학교 시절 테니스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고 딸 앤지는 발레를 좋아해서 상당한 수준까지 발레를 익혔다. 어쩌면 나의 가장 큰 성취는 바로 이 아이들이 아닐까 아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두 아이가 자랑스럽고 모범적인 사회인이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 덕분이다. 아내는 힘들고 바쁜 생활 속에서도 좋은 가정교육으로 아이들을 인도해 주었다. 고마울 뿐이다. 깨지 못한 유리천장 신발 사업은 점점 번창했다. 노력하는 만큼 손님이 늘고 매출이 늘어났다. '아 사람들이 이런 재미로 사업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두 배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월급을 두 배로 주지 않는다. 사업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과 정력을 쏟는 만큼 대가가 돌아왔다.

2009-12-07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52] 아내가 아이 떄문에 직장 그만두자 생활난···페이먼트라도 벌기 위해 보험 세일즈 부업

일반 직장인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이 휴무이기 때문에 그나마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다. 그러나 세일즈맨은 다르다. 오히려 주말이 더 바쁘다. 고객들이 주로 주말을 이용해 쇼핑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중에 하루 쉬는 날이 있기는 했지만 당장 실적을 올려야 하는 입장에서 쉰다는 게 맘이 편치 않았다. 나는 한 명이라도 더 나의 고객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에 거의 직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직장에서 실적을 많이 올려 상도 받고 승진도 하면서 일에 재미가 붙자 휴일은 아예 잊고 살았다. 휴식보다 일이 더 좋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니저 일을 할 때는 더 시간이 부족했다. 매장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제들을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자리를 비우기가 어려웠다. 가끔 하루 정도 쉬었다가 출근해 보면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었던 작은 문제들이 꼬이고 꼬여서 큰 문제로 변해 있는 경우도 많았다. 차라리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이 더 속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신발 장사를 할 때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주말이 더 바쁘고 가게 문을 닫는 날은 1년에 딱 3일이었다. 내가 매장에 없는 날은 매상도 떨어지고 고객과 종업원 간에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세 곳이나 되는 가게를 돌아가며 관리해야 하니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맞벌이의 피해자였던 아이들 아내는 아이 둘을 낳고도 공무원 생활을 계속했다. 별수 없이 아이들을 베이비시터에게 맡겼다. 맞벌이 가정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통이지만 아이들을 직접 돌보지 못하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아내도 늘 마음 아파 했다. 아이들이 네 살 두 살 정도 되었을 때였다. 하루는 베이비시터가 아파서 오지 못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직장 근처의 유아원에 임시로 맡겼다. 오후에 데리러 갔더니 아이들의 얼굴이며 손에는 땟국이 줄줄 흐르고 기저귀는 제때 갈아주지 않아 묵직해져 있었다. 거지아이가 따로 없었다. 정말 마음이 아팠다. 그날 우리 부부는 아이들 양육 문제에 대해서 오랜 시간 의논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아이들을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중요하지 돈이 중요하냐며 아내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돌보라고 말했다. 우리는 열심히 맞벌이를 한 덕에 수영장이 딸린 근사한 단독 주택을 사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둘이 벌어도 매달 적지 않은 융자금을 갚고 나면 그다지 여유가 없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아내는 힘들더라도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월급도 많고 주말에는 꼬박꼬박 쉬기 때문에 누구나 선망하는 직장인데 그만두기가 아깝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설득에 처음에는 망설이던 아내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내 말에 수긍해 주었다. 아내는 다음 날 바로 사표를 냈다. 아내의 5년간의 직장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아내가 사표를 내자 당장 생활비가 달렸다. 매니저로 제법 두둑한 월급을 받기는 했지만 월급의 절반 가까이가 주택 융자금을 갚는 데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보험 세일즈였다. 세일즈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짬짬이 보험을 팔았다. 이른바 '투잡'을 뛴 것이다. 직장 일 하랴 틈틈이 사람을 찾아 다니며 세일즈하랴 숨 돌릴 틈이 없었다.

2009-12-03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51] 고객을 배려해 먼저 찾아가는 서비스, 돈벌며 고맙다는 소리듣는 교훈 얻어

신발 가게에서 배운 소매업의 노하우 고객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쏟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고객 리스트를 만들어 3개월에 한 번씩 아이들의 발 사이즈를 체크하러 오라고 엽서를 보냈다. 엽서를 받은 고객들은 대부분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발에 맞는 신발을 구입했다. 엽서를 보낸 것은 고객을 불러들이겠다는 의도에서였지만 고객들은 "벌써 3개월이나 됐어요?" 하면서 우리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아이가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을 뻔했다고 고마워했다. 이익을 챙기면서도 고맙다는 소리를 듣게 되니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전략이었다. 우리 가게 옆에는 다른 가게도 있고 노드스트롬이라는 백화점도 있었지만 일단 단골이 된 고객들은 가격 차이가 조금 나더라도 개의치 않고 우리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해 갔다. 가게 앞에서 슬쩍 안을 쳐다보고서 내가 있으면 들어오고 없으면 그냥 지나친다는 고객도 있었다.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인간적인 관계 신뢰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신발 가게를 운영하면서 실감나게 배울 수 있었다. 신발 가게를 하면서 서킷시티에서는 몰랐던 또 다른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바로 소매업의 노하우였다. 소매업에서는 손님과의 눈맞춤이 가장 중요하다. 손님이 인간적으로 소중하게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야 한다. 종업원이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집을 다시 찾을지 말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손님은 돈을 주고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사람이다. 불만스러우면 언제든지 다른 업소를 찾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객이 왕이고 주인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두 번 세 번을 찾아가도 알은체도 하지 않는 곳이 있고 두 번째 찾아가도 "어서 오세요. ○○선생님" 하고 맞아주는 곳이 있다. 얼굴을 기억해 주면 손님은 그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낀다. 비즈니스는 거래다. 주고받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려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주려는 사람이 슬슬 피해 달아난다. 고객은 주인이 베푸는 만큼 돈을 쓴다. 고객을 만족시키면 고객은 돈을 쓰면서도 고마워한다. 돈을 벌면서 고객들로부터 고맙다는 말까지 듣는다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는가. 신발 장사를 하면서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큰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 겸손하게 고객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의 기본이기도 하다. 맞벌이 부부의 애환 미국 생활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흔히 잡지에 나오는 궁전 같은 집 고급 승용차 푸른 대자연과 아름다운 공원 풍요로운 생활 등을 떠올리며 부러워한다. 그러나 미국 생활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미국 가서 좀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미국행을 택한다면 십중팔구 금세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한인동포들은 "미국 생활은 페이먼트 인생"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빚을 내서 생활하는 것이 그만큼 일반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미국에서는 약간의 '다운 페이먼트만 내면 집이나 차를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50만 달러짜리 집을 산다고 할 때 자기 돈으로 10~20퍼센트의 보증금만 내면 나머지는 은행에서 융자를 해준다. 명목상으로는 내 집이지만 실상은 대체로 30년 동안 융자금을 갚아야 하는 집인 셈이다. 한마디로 미국의 소비 패턴은 나중에 가질 수 있는 것을 빚을 내서 미리 당겨서 누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느 가정이나 빚이 많다. 주택 대출 자동차 대출 신용카드 대금 등 매달 갚아야 할 빚 때문에 돈을 잘 버는 사람이나 못 버는 사람이나 돈에 여유가 없고 빠듯하게 지내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아주 궁핍하게 살 수밖에 없다. 한인동포들은 대략 70~80퍼센트가 맞벌이다. 부부가 모두 봉급 생활자이거나 아니면 부부가 함께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한 명은 사업을 하고 한 명은 봉급 생활자이다. 일하랴 아이들 학교 보내랴 살림하랴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동포들이 허다하다. 형님네 부부도 간이식당을 함께 운영하면서 바쁘게 살고 있었고 누나네도 부부가 모두 봉급쟁이 생활을 하면서 숨 돌릴 겨를 없이 살았다. 우리 집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2-02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9] 상사와 불화로 잘나가던 10년 직장 그만둬···현대차 세일즈 하면서 신발가게 사업 모색

그렇게 야심차게 출발하려는 즈음 총매니저와 갈등이 생겼다. 그는 사고방식이 편협한 데다 나와는 일하는 방식이 맞지 않아 둘 사이에 종종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나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수키가 승승장구하더니 오만해져서 이제는 윗사람 말도 잘 듣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스스로 누구보다 겸손하고 예의바르다고 믿고 있었는데 오만해졌다는 말을 듣다니 참아 넘기기가 힘들었다. 백인 우월주의 성향이 있는 데다 내가 회사에서 쑥쑥 커나가니 시샘을 하는 게 분명했다. 그는 사장에게 나와는 일을 못 하겠으니 조치를 취해달라는 건의를 올렸다.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 단 한 번도 남에게 책잡힐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내가 해명해 보아야 득이 없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나의 진심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하고는 일을 못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표를 냈다. 10년 직장 생활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종지부를 찍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당시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톡톡히 수업료를 치르다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둔 1986년 내 주변에서도 큰 변화들이 생겼다. 항상 곁에서 어머니같이 의지가 되어주던 큰누나가 갑자기 세상을 뜨신 것이다. 그리고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수입이 딱 끊기는 상황이 되었다. 수영장이 딸린 멋진 단독 주택을 산 터라 융자 상환금이 발등의 불이 되었다. 미국 생활 10년 만에 처음 맞는 최대 위기였다. 뭐라도 해야 했다. 아내가 직장을 그만둔 뒤 나 혼자의 수입으로 생활하기가 빠듯해서 직장 일과는 별도로 짬짬이 해오던 생명보험 세일즈 외에 현대자동차도 팔기 시작했다. 현대의 엑셀이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한 즈음이었다. 자동 변속 장치로 만들어서 처음 선보인 엑셀은 페달을 밟아도 금세 속력이 붙지 않을 정도로 어설펐지만 일제 차가 7000~8000달러일 때 4999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을 내걸었다. 처음에는 가격이 워낙 좋아 잘 팔렸다. 한국 차가 미국에 수출되었다는 자부심 애국심에서 한인동포들도 많이 구입했다. 당시 미국 시장에서는 'HYUNDAI'를 놓고 사람마다 발음이 달랐다. '훈다이' '하연다이' 등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현대에서 기발한 TV 광고를 했던 것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선데이 먼데이 현데이'라는 문구 덕분에 사람들은 '현대'와 가장 근접한 발음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가 성공 신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잘 보여준 예였다. 자동차는 생소한 분야였지만 나는 금세 세일즈 실적 1위를 차지했다. 우리 딜러에는 30여 명의 세일즈맨이 있었는데 고객이 한 명 들어오면 순서대로 그 고객을 상대해 차를 팔고 커미션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다른 세일즈맨들의 성공률이 30~40퍼센트 정도일 때 나는 70~80퍼센트를 달성했다. 차에 대해서 많이 알아서가 아니었다. 서킷시티에서 익힌 판매 노하우가 그대로 먹혔던 것이다. 그렇게 초라하게 시작했던 현대자동차가 지금은 렉서스나 BMW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성능과 안전성이 우수한 자동차를 만들어내고 현대와 기아의 판매량이 세계 4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그럭저럭 생활비를 벌면서 뭔가 안정적인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킷시티에서나 현대차에서나 나의 세일즈 실력은 일단 검증이 된 셈이었다. 고객들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전자제품 판매점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워낙 큰 체인점들이 많아 작은 규모로는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전자제품은 마진이 작아서 웬만해서는 수익을 내기 힘들었다. 마진도 크고 고객 관리를 잘하면 꾸준하게 매출을 키워나갈 수 있는 업종이 무엇일까 고심하던 끝에 아동 신발 전문점을 떠올렸다. 신발은 마진이 큰 편이다. 더욱이 아동용 신발은 아이들이 커나가면서 계속 새로 사 신어야 하기 때문에 고객 관리만 잘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1-30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8] '유리천장 그 너머'

그동안은 고객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왔지만 이제는 전체 운영 시스템을 보고 재고 처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하는지 문제점은 무엇인지 파악하고 개선 방안을 생각해야 하니 일이 훨씬 어렵고 복잡해졌다. 내가 근무하지도 않은 매장의 윤곽을 일주일 동안에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지만 나는 나름대로 문제점을 분석하여 사장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미국 서부 지역 책임자인 켄 앤토스 사장이 보고서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수키 이 보고서를 당신이 혼자 썼소? 이 정도 보고서는 매니저 생활을 적어도 4년 이상은 해야 나올 수 있는 내용이오. 놀랍소." "제가 느낀 대로 분석해서 썼을 뿐입니다.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장은 내 보고서에 회사 차원에서 검토할 만한 신선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면서 본사 회장에게 보내겠다고 했다. 기존 직원들은 관행에 젖은 탓에 보지 못하지만 신출내기 매니저인 나의 눈에는 보였던 문제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후 본사 회장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왔다. 보고서가 매우 훌륭하다며 회사의 경영 개선에 반드시 참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올린 보고서가 이렇게 화제가 되리라고는 나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는 곳마다 실적을 올렸지만 6주의 연수 기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매니저 업무에 착수했다. 풀러턴 지점에서 8개월을 근무하면서 실적을 150퍼센트로 올려놓았다. 회사는 나를 매출 규모가 더 큰 매장으로 잇따라 전근시켰다. "수키가 가면 달라진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노워크 매장 토런스 매장 등으로 옮겨 다니며 가는 곳마다 매출을 올리는 아이디어로 실적을 냈다. 나는 어디를 가든 세일즈의 기본기부터 철저하게 교육시키고 서비스 관행을 개선했다. 고객이 오면 우선 인사부터 잘하도록 시켰다. 거기에서 첫인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다음 고객의 입장에서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고객의 필요에 가장 부합하는 제안을 함으로써 신뢰를 얻고 신뢰를 얻은 다음에 제품을 설명하고 고객의 마음이 흔들리기 전에 제품을 구입하도록 마무리를 잘하게 했다. 예를 들어 고객이 물건 값을 깎아달라고 요구할 경우에 어떤 세일즈맨은 중간에서 포기하지만 현명한 세일즈맨은 "잠깐 기다려보세요. 매니저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하며 나를 부른다. 이때 내가 고객에게 "지금 우리 직원이 제시한 가격도 좋은 가격이지만 제가 특별히 더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자연스럽게 고객과 대화하다 보면 고객 입장에서 아주 기분 좋은 거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한번 찾아온 고객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각오로 직원들에게 세일즈 마인드를 주입시키니 실적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이 고객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대하니 고객이 당초 생각했던 예산보다 더 구매하게 되는 일도 많아졌다. 커미션 수입이 많아져서 사기가 오른 직원들은 더욱 열심히 물건을 팔았다. 직원들은 나와 함께 일하면 신이 난다고 했다. 팀워크가 탄탄해진 것이다. 인간적으로 서로 친해지다 보니 자연 이직률도 낮아졌다. 1985년 회사는 본격적인 도약을 위해 이름을 바꾸고 전국적인 체인점으로 탈바꿈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훗날 미국 최대 전자제품 유통 회사로 성장한 '서킷시티' 프로젝트였다. 서킷시티는 아쉽게도 금융 위기 와중에 2009년 초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나는 프로젝트 선발대로 차출되어 6개월간 특별 연수를 받고 연수를 마치자마자 서킷시티 창립 작업에 합류했다. 다음 해 11월 회사는 서킷시티라는 새 이름을 내걸고 오렌지카운티에 5개 매장을 동시에 열면서 전자제품 유통 업계의 톱 브랜드를 목표로 힘차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헌팅턴 비치 매장의 운영 담당 매니저로 발령받아 근무를 시작했다. 총매니저 바로 아래 직책이었다. 〈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1-25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7] 세일즈 실적 1등은 항상 내가 독차지···입사 3년도 못돼 최연소 매니저 따내

항상 1등을 도맡아 차지하다 보니 실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점점 커졌다. 주말에는 고객이 더 많기 때문에 세일즈맨들은 주말도 없이 평일 가운데 하루를 돌아가면서 쉬었다. 나는 하루를 쉬면 다른 세일즈맨에게 고객을 빼앗길까 봐 쉬는 날에도 일했다. 한마디로 일벌레가 되어버린 것이다. 열심히 일한 결과 상위 세일즈맨으로 승진하면서 인근 풀러턴 시의 매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1978년 여름이었다. 매니저는 60대의 네덜란드계 이민자인 닐 몰랜다이크라는 백인이었는데 정말 좋은 분이었고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열심히 일했다. 새로 옮겨간 매장이었지만 가자마자 톱 세일즈맨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렇게 2년 정도 지났을 즈음이었다. 몰랜다이크가 은퇴를 앞두고 있어서 회사에서는 후임자를 정해야 했다. 그동안 나를 눈여겨본 몰랜다이크는 나를 매니저 후보로 강력히 추천했다. 그렇지 않아도 단조로운 세일즈맨 일에 슬슬 싫증이 나던 참이었다. 나는 욕심이 생겼다. 매장에서 고객을 상대로 매일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보다는 그동안 쌓은 노하우를 갖고 관리자 역할을 한다면 또 다른 도전이 될 것 같았다. 다섯 후보가 경합하고 있었는데 나 빼고는 모두 백인이었다. "매니저를 하려면 직원들이 흔히 쓰는 속어 같은 것도 다 알아들어야 할 텐데 이해할 수 있나요?" 사장은 나의 미국 생활이 채 3년도 안 되었고 내가 쓰는 영어가 원어민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매니저는 수많은 직원들을 관리하고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데 직원들이 쓰는 미묘한 속어까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지금까지 두 시간 동안 사장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제가 못 알아듣거나 제가 한 말을 사장님께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까? 슬랭을 이해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매니저로서 능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 결코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돌하게 말했다. 그는 좋은 답변이라고 칭찬했다. 내가 이긴 것이다. 다섯 후보 중에서 내가 매니저로 선정되었다. 입사 2년 반 만이었다. 그때 내 나이 27세였다. 이 회사의 역사를 통틀어 아시아계 매니저도 처음이거니와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매니저로 승진한 예도 없었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위한 길목에 섰다. '무조건 이겨내야 한다. 아직도 은연중에 남아 있는 소수계 이민자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실력을 다져야 한다. 남보다 덜 자고 더 일하자' 나는 이렇게 각오를 다졌다. 소수계 이민자를 얕잡아보는 백인들이라도 실력이 월등한 상대에게는 고개를 숙인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향한 나의 뜀박질에는 더욱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대기업 매니저에서 신발가게 사장으로 나는 본격적인 매니저 훈련에 돌입했다. 회사에서는 나를 위해 6주간의 특별 연수 프로그램을 마련해 주었다. 좋은 매니저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이만큼 투자를 해준 회사에 대해 나는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나는 연수 기간 동안 회사 안에서 가장 실적이 좋은 선임 매니저들이 운영하는 매장에 가서 그들의 경영 기법을 배웠다. 매니저마다 스타일이 다르니 다양한 경영 방식을 배우라는 게 회사의 의도였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1-25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6] 첫 보금자리 기쁨도 잠시…이삿날 TV 등 모두 도둑 맞아

델 데리고 매니저는 나를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가끔은 나에게 만족스럽다는 의미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나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눈빛도 조금씩 달라졌다. 내가 몇 등을 달리고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판매 실적을 올려도 다른 베테랑 동료들을 따라잡기는 어려울 게 뻔하니까.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났다. 회사 전체의 실적이 아주 좋아서 들뜬 분위기였다. 다음 해 1월 말 판매왕을 발표하는 날이 되었다. 서부 지역 사장은 세일즈맨 전원을 저녁식사에 초대해 매출이 신장된 데 대해 감사 표시를 하고 그날의 피날레인 세일즈 콘테스트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상위직 세일즈맨 중 수상자를 발표한 다음 마지막으로 주니어 세일즈맨 시상이 있었다. 사장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한국에서 얼마 전에 이민 온 수키 캥이 1등을 했다"고 발표했다. 순간 나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설마 내가?' 동료들이 박수를 치고 내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오 마이 갓!" 내가 주니어 분야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날 아내와 나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웃음다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이민 1년 만에 꿈에 그리던 '마이 홈'을 취직하고 얼마 안 되어 우리는 누나 집에서 나오기로 했다. 이제 얼마간의 돈벌이가 생겼으니 더 이상 눈칫밥을 먹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누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아파트를 구했다. 당시 방 2개짜리 아파트의 월 임대료는 240달러 정도였다. 그러나 한 곳에 갔더니 훨씬 싼 아파트가 있었다. 월 180달러짜리였다. 당연히 동네가 좋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첫 보금자리를 찾은 기쁨에 기분이 들떴다. 월세 집이기는 하지만 이사 기념으로 누나가 RCA 컬러 TV를 한 대 장만해 주었다. 이사하는 날 우리는 이삿짐을 차에다 실어 조금씩 나르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 점심을 먹고 다시 짐을 나르러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도둑이 몽땅 짐을 들고 가버린 것이다. 컬러 TV도 결혼할 때 장모님께서 해주신 새 양복 여러 벌도 다 집어가고 집이 텅텅 비어 있었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기분 좋게 첫 출발하려던 날 우리 부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 동료였던 마이크가 내 이야기를 듣고 딱했던지 자기가 쓰던 침대와 소파가 있는데 가져다 쓰겠느냐고 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내 처지가 비참한 생각이 들어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울었다. 왜 그렇게 감정이 북받쳤는지. 세간을 새로 장만하려면 목돈이 들어가야 할 판인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고맙다며 마이크의 침대와 소파를 받아들였다. 그럭저럭 임대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꾸몄지만 마음은 어수선하고 착잡했다.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후진 동네 낡아서 퀴퀴한 냄새가 배어 있는 아파트. 거기다 새로 시작한 직장에서는 허둥지둥 헤매고 있자니 마음이 곱절로 심란했다. 지금도 그 당시에 흘러나오던 음악을 듣게 되면 타임머신을 타고 간 것처럼 그때의 칙칙했던 심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한다. 사정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판매왕을 차지했는가 하면 취직한 다음 해 2월부터는 월급도 많이 올랐다. 견습 기간이 끝나서 정규 월급을 받게 된 것이다. 월 500달러 정도 받다가 2000달러까지 올랐으니 엄청난 인상이었다. 갑자기 크게 오른 월급 명세서를 보면서 이 정도면 떵떵거리고 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1-24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5] "뭐 이런 사람이 세일즈를 한다고…" 고객 입장에서 파니 '판매왕' 등극

여러 번 촌극을 빚으면서도 어쨌든 열심히 하다 보니 가스레인지 같은 조금 비싼 제품을 담당하는 코너로 배정받았다. 한번은 50대 중반의 여자 손님이 오븐의 '벤트'(vent)에 대해서 물었다. 벤트? 벤트?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내가 벤트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눈치챈 손님은 입으로 바람을 훅훅 불면서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그제야 벤트가 환풍기를 뜻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손님은 웃으면서 나의 등을 툭툭 치며 괜찮다고 위로해 주었다. 무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속 넓은 손님들은 너그럽게 봐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손님도 많았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뭐 이런 사람이 세일즈를 한다고…' 하는 표정으로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적도 많았다. 그럴 때면 옆에서 지켜보는 동료들의 비웃음 섞인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한국에서 내가 배우고 익힌 영어는 살아 움직이는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보잘것이 없었다. 더구나 내가 언제 전자제품의 부품 명칭 같은 단어를 써보기나 했던가. 전자제품을 사러 찾아오는 손님들은 처음 듣는 부품 이름이나 용어를 써가며 기능을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에도 진땀이 날 정도였다. 하루하루 쩔쩔매면서 일하는 내 모습을 가장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매니저 '델 데리고'라는 이탈리아계 노인이었다. 그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체크하고 있었다. 내가 손님들에게 휘둘려 어리벙벙해 있으면 그는 어김없이 나를 불러 등을 두드려주며 "수키 잘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앞으로 잘해낼 거야" 하면서 힘을 북돋워주곤 했다. 내가 석 달만 시간을 달라고 했더니 정말로 석 달은 참아주기로 한 것 같았다. 강석희 판매왕이 되다 한 달 정도 지나니 매장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오고 손님을 맞는 일에 조금씩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이름도 다 외웠고 편안하게 인사를 나눌 여유도 생겼다. 하루는 데리고 매니저가 나를 부르더니 시간외근무를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 푼이 아쉬운데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당장 그러겠다고 했다. 시간외근무를 하면 정규 근무 시간보다 1.5배의 시급을 주기 때문에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매니저는 나에게 또 하나의 숙제를 안겼다. 연말에 전체 세일즈맨을 대상으로 판매왕 선발 대회가 있으니 열심히 해보라는 것이었다. 세일즈 콘테스트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사 두 달도 안 된 풋내기가 섣불리 욕심을 낼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해 크게 관심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매니저는 각 분야별로 1등을 선발하는데 나는 신참들끼리 경쟁하는 주니어 세일즈 분야에서 성적을 매기겠다고 했다. 1등상은 1월에 발표하고 상품은 부부 동반 하와이 여행이라고 했다. 귀가 솔깃했지만 언감생심 하나같이 경력이 쟁쟁한 동료들을 제치고 내가 어찌 1등을 차지하겠나 싶었다. 11월은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쇼핑 시즌이 시작되는 달이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가 연이어 있기 때문에 소매업소들로서는 11월 12월이 대목이다. 이 시즌에 맞춰 업소들이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할인 행사를 하기 때문에 이 시즌을 기다렸다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많다. 아니나 다를까 11월이 되자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때 줄 선물을 고르러 오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어서 덩치 큰 가전제품보다는 내가 맡고 있는 소형 제품 코너에 유독 손님이 몰렸다. 나는 부지런히 설명하고 팔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날마다 실적이 쑥쑥 오르니 신이 나고 살맛이 났다. 아무래도 언제나 반듯하고 겸손해 보이는 나의 자세가 큰 장점으로 작용한 듯했다. 원하는 것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들어주겠다는 태도로 임하니 정말 친절하다며 고마워하는 고객이 늘었다. 나의 세일즈 방식이 고객들에게 먹혀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고객에게 물건을 팔려고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고객이 가장 합리적으로 구매할 수 있게 도와주려고 애썼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매자의 입장이 아니라 고객의 입장이 되어야 했다. 고객은 자신이 세일즈맨의 돈벌이 대상이 아니라 세일즈맨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다고 느끼면 부담없이 물건을 구입한다. 이것이 내가 아는 세일즈맨의 기본 자세였고 부친을 도우며 터득한 세일즈 정신이기도 했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1-23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4] "나 뽑아도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다" 읍소···미국 온지 3달만에 꿈에 그리던 직장 얻어

취업 원서를 낸 지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인터뷰에 응할 의향이 있느냐고 묻고는 언제 어디로 와서 '미스터 지만도'를 찾으라고 했다. 순간 당황해서 '지만도'란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지먼드' 정도로 알아들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이제 되었다 인터뷰를 하자고 전화가 왔으니 절반은 성공한 거다 나는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약속한 날 현장에 가서 '미스터 지먼드'를 찾았다. 직원들이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런 사람은 없다고 했다. 황당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며 '지먼드'를 찾고 있는데 한 직원이 "오우 지 만 도!" 하면서 나를 그에게로 안내했다. 찾아가 보니 가전제품 매장이었다. 나를 탈락시킨 조디스에서 세일즈 직원을 구하고 있던 이곳으로 내 입사 원서를 넘겼던 것이다. '메이저 LA 코퍼레이션'이라는 전자제품 유통 회사였는데 훗날 미국 최대의 전자제품 체인점이 된 서킷시티의 모태였다. 미스터 지만도는 이 회사의 서부 지역 매니저였다. "미국에서 산 기간이 얼마나 되나요?" "두 달 정도 됩니다." "세일즈 경력은 있나요?" "없습니다." 지만도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아니 경력도 없는데 무슨 배짱으로 지원했나요?" "경력은 없지만 아버지가 하시는 세일즈를 많이 도왔습니다." "미국 온 지 두 달밖에 안 되었다는데 영어에 자신 있나요?" "자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영어 웅변대회에서 1등을 했습니다." 지만도는 긴가민가하는 표정이었다. 미국에 온 지 두 달밖에 안 된 외국인 풋내기를 채용한다는 것은 모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간절한 내 태도에 약간 흔들리는 듯한 그의 표정을 간파하고 나는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석 달만 기회를 주십시오. 당신이 나를 뽑은 것이 실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지만도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퍼졌다. 나의 간절함과 당돌함에 넘어간 표정 같기도 했다. 드디어 그가 물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일할 수 있나요?" 직감적으로 그가 나에게 기회를 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라도 가능합니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일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세요." 지만도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미국 사람들이 흔히 하는 제스처처럼 주먹을 몸 쪽으로 당기며 "예스!" 하고 소리쳤다. 미국 땅을 밟고 나서 암담했던 두 달 동안의 먹구름이 걷히는 순간이었다. - 먹구름은 걷히고 1977년 9월 1일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꿈에도 그리던 미국의 첫 직장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첫 직장으로 향하는 내내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석 달의 기회를 달라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컸다. 세일즈는 물론이고 직장 생활 자체가 처음이니 이런저런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다음 바로 매장에 투입되었다. 신참들은 주로 라디오나 워크맨처럼 작고 싼 물건을 취급하는 코너에 배치되었다. 고객들이 물건을 구경하고 있으면 옆으로 다가가 물건 고르는 것을 도와주고 기능을 설명하면서 구매를 유도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자신이 상대한 고객이 물건을 사면 그 판매액의 몇 퍼센트를 커미션으로 받는데 기본급이 시간당 2달러 50센트이니 하루 8시간 일해야 한 달에 500달러 남짓의 월급을 받는 수준이었다. 기본급이 적으니 적극적으로 뛰어서 커미션을 많이 받아야 했다. 나는 10여 명의 세일즈맨들이 일하는 매장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동료 세일즈맨들도 처음에는 힐끗힐끗 이상한 사람 쳐다보는 듯한 눈길을 보냈고 고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실수 연발이었다. 손님이 무슨 용어를 써가며 물어보는데 알아듣지 못해 얼굴이 빨개져서 다른 동료에게 달려가 물어보았다. 그러면 고객들은 대개 초보인가 보다 하고 다른 노련한 세일즈맨을 부르곤 했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1-19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3] 누나네 집에 빌붙어 살던 두 달여 시간, 취직도 못한 나는 패배자의 심정이었다

- 아내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누나네 집에 '빌붙어' 살던 두 달여의 시간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이들 넷에 어른 넷이 복닥거리는 그 공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신문의 구인란을 뒤지며 전화하는 것이 내 하루 일과였다. 취직은 쉽지 않았다. 경력자를 모집하는 곳이 대부분이었고 내 영어를 듣고서는 그냥 끊어버리는 곳도 많았다. 미국 생활의 생존 도구라 생각하고 영어에 매달렸고 한국에서는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막상 미국인들에게는 귀에 거슬리는 외국인 액센트의 영어일 뿐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올 때 손에 2000달러 정도를 쥐고 있었는데 LA에 내려와 중고차를 한 대 샀더니 수중에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 돈은 떨어지고 취직은 안 되고 형이나 누나에게 도움을 청할 상황도 아니고…. 막막하고 외로웠다. '괜히 미국에 온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는 알아주는 영어 실력이니 마음만 먹으면 대기업에 취직해서 순탄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일까'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마음은 급한데 취직의 가능성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산 강석희'는 결국 무용지물인가. 답답한 마음에 아내와 함께 집 근처에 있는 뉴포트비치로 차를 몰고 나가 망망한 태평양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저 건너편에 있는 한국이 그립고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어머니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너무나도 듣고 싶었다. 그러나 힘들다고 전화를 할 수는 없었다. 아내의 얼굴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말없이 아내의 어깨를 보듬어주는 것 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보 힘들지? 조금만 참아줘." "아니에요. 당신이 너무 힘들어 하는 게 안쓰러워서…." 나는 하마터면 아내에게 '우리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고 물어볼 뻔했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 나오려 할 때 나는 심호흡을 하며 이를 지그시 물었다. 그때 아내가 울고 매달리며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차가운 바닷바람에 머리가 점차 맑아졌다. 축 처졌던 마음도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나약해지려는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했다. 태평양을 건너며 내 인생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잘살아보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불과 두 달도 못 되어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뉴포트비치에서 우리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집으로 돌아왔다. - 나를 뽑은 것이 실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겠소 며칠 후 LA로 오라고 나를 부추겼던 친구 조원용이 불쑥 찾아왔다. 신문을 오려 왔는데 하시엔다 하이츠라는 지역에 들어설 '조디스'라는 대형 할인 매장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구인 광고였다. 일단 공개 모집이니 입사 원서를 내보기로 했다. 친구는 내게 세일즈 분야로 지원하라고 조언했다. 미국에서는 세일즈 분야에서 일해야 비전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넉살이 좋은 사람이 못 되니 세일즈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친구는 무조건 세일즈를 지원하라고 다그쳤다. 나는 세일즈 분야로 아내는 사무직으로 각각 원서를 냈다. 이곳저곳 시도했다가 내리 좌절만 경험한 터라 별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2009-11-18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2] 형 음식점서 일한지 몇주후 동창이 LA행 권유···OC 사는 누나가 마중 나오면서 OC와 인연

샌프란시스코의 날씨는 6월인데도 비가 구질구질하게 내리고 쌀쌀했다. 내 신세가 날씨만큼이나 비참해 보였다. 나만 믿고 이곳까지 따라왔는데 오자마자 감자 씻고 웨이트리스 일을 하는 아내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 아내는 좋은 가정에서 어려움 없이 자란 귀한 집 딸이었다. 대구에 있는 경북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려대에 합격한 재원이었고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규수였다. 그런 아내를 이렇게 조그만 식당에서 웨이트리스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그러나 아내는 생각보다 참 잘 적응했다. 그럭저럭 몇 주가 지나갔다. 당시 LA에 고교 대학 동창인 조원용이라는 친구가 1년 전에 미국에 와 세븐일레븐에서 캐시어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는 반가운 나머지 그길로 밤새도록 수동식 폭스바겐 '버그'를 8시간이나 운전해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우리는 사흘 동안 형네 집 좁은 차고 방에서 자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밤새 이야기했다. 친구는 LA에 가서 살아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우선 캘리포니아 남부 쪽에는 일자리가 더 많고 한인들도 다소 있어서 새로 시작하기가 훨씬 쉽다는 이야기였다. 아내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였다. 나는 LA로 갈 결심을 굳히고 형에게 내 뜻을 전했다. LA에 가서 새로 시작하겠노라고 여기서 형한테 폐만 끼치고 있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고. 형은 상당히 언짢아하면서 마음대로 하라며 역정을 냈다. 이민자의 운명은 마중 나온 사람이 결정한다? 우리는 다시 비행기에 이민 가방을 싣고 LA로 향했다. 롱비치 공항에 도착해 큰누나와 친구 원용이의 마중을 받았다. 누나는 당시 오렌지 카운티의 산타아나 시에 있는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방 2개짜리 임대 아파트였다. 누나네는 아이가 넷이었는데 한국에서 우리가 떠나올 때 남아 있던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 방 2개에 8명이 살게 된 셈이었다. 누나도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가 막혔으리라. 한국에서 의사였던 매형은 화학 공장에서 야간 일을 하고 있었고 누나도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더부살이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에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부나 할까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형도 누나도 우리를 돌보아줄 형편이 아니었다. 다들 너무 바쁘고 자기 살기에도 벅찼으니까. 미국 가정은 대체로 맞벌이다. 혼자 벌어서는 집 할부금이나 임대료를 내고 자동차 굴리고 생활비를 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둘이 벌어야 겨우겨우 살아가는 것이 미국 이민자들의 평균적인 삶의 모습이다. 그런 형편이니 아무리 피붙이라도 시간과 돈을 들여 처음부터 끝까지 보살펴줄 여유가 있는 집은 그리 많지 않다. 샌프란시스코의 형도 오렌지 카운티의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14살 위인 큰누나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대신해서 나를 돌봐주어 나에게는 엄마나 다름없는 누나였고 늘 우리에게 잘해주려고 애를 많이 썼다. 미국 한인사회에는 이민 올 때 공항에 누가 마중 나오느냐에 따라 직업이 결정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미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오다 보니 마중 나온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러다 보니 도움을 주는 사람이 사는 곳 근처에 살게 되고 또 그 사람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당시 누나가 한인들이 많은 LA에 살면서 한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면 나도 LA 근처에 있는 어느 한인 직장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서킷시티가 미국에서의 첫 직장이 될 일도 없었을 테고 영어는 한국에서보다 더 녹이 슬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결국 오렌지 카운티에 살고 있는 누나가 공항에서 나를 마중한 것이 그 지역에서 시장까지 된 내 인생의 씨앗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돌이켜보면 인생살이란 참으로 많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그 작은 우연이 삶의 모양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상 모든 일에 더욱 진지해지고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1-17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1] 형이 하는 식당에서 감자 깎으니 만감교차···"고작 이런일 하려고 영어공부 했나" 서러움

미국에는 약 200만 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한국을 알릴 수 있는 문화 공간이 없다. 중국 커뮤니티나 일본 커뮤니티는 박물관 문화 센터 등 자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려주는 '랜드마크'를 이미 여러 곳에 세웠다. 지금 내가 시장으로 있는 어바인에는 21세기 미국 내 최대 공원이 될 '그레이트파크'가 조성되고 있다. 나는 이곳에 들어설 다문화 센터에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릴 수 있는 한국문화센터를 건립하려는 꿈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시장 임기 동안은 물론 그 이후에도 내 모든 정력을 쏟을 생각이다. 우리 한인사회의 미래를 위한 위대한 사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문화센터는 이번 세대뿐만이 아니라 다음 또 그다음 세대로 이어갈 수 있는 미래를 위한 작업이다. 어쩌면 나의 미국 생활의 피날레를 장식할 마지막 꿈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국문화센터는 인간 강석희로서 어바인 시의 시장으로서 내가 성취할 수 있는 귀중한 꿈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시의원으로서 '그레이트파크' 계획을 수립할 기회를 주셨고 또한 시장으로서 이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셨다. 어바인 주민들은 물론 미국인들의 오아시스가 될 소중한 공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막중한 기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50년 100년 후를 바라보면서 나는 오늘도 '그레이트파크' 공사 생각에 마음이 설레 잠을 설친다. 3장. 내가 미국에서 배운 것 큰형은 원래 약간 반항아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머리는 비상했다. 10대 시절부터 영화배우가 되겠다던 꿈 많은 청년이었다. 고3 때 연예인의 길을 가겠다고 공부를 거의 하지 않다가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두고 벼락공부로 17대 1의 경쟁을 뚫고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해 가족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는 이러한 형의 강한 면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형처럼 '한다면 한다'는 자세를 가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모범생 스타일인 나와는 딴판으로 형은 항상 도전 정신이 넘쳤다. 형제라고는 해도 12살 차이가 나다 보니 함께 어울릴 기회도 서로를 알 기회도 별로 없었다. 남들은 한창 대학 생활을 즐길 즈음인 대학 2학년 때 형은 미련 없이 학교를 그만두더니 훌쩍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62년이었으니 유학을 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때였다. 처음에는 공부하러 간다고 갔던 형은 그냥 미국에 눌러앉았다. 우리 부부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 형이 마중을 나왔다. "형님 저 왔습니다." "응 그래 온다고 고생했지?" 형은 그저 덤덤했다.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반가워하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약간 서먹서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형과 형수님은 함께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침과 점심을 파는 미국 식당이었다. 일단 형 집에 짐을 풀었다. 형은 당분간 차고를 개조한 방에서 지내라고 했다. 며칠 후부터 우리 부부는 형이 운영하는 식당에 나가서 일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나는 감자를 씻고 써는 일을 도왔고 아내는 손님들에게 서빙하는 일을 도왔다. 성격이 좋아서인지 아내는 형수님과 금세 친해지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린 첫날부터 좀 불편한 기분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대하는 형의 냉랭한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렸다. 형이 원래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닌 데다 미국 생활을 오래 해 한국식의 잔정 표현에 익숙지 않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이해했다. 그때는 형님이 우리를 마치 짐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감자를 씻고 써는 일을 며칠간 도와주면서 '내가 미국에 와서 고작 이런 일을 하려고 그토록 영어 공부를 했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실망스럽기도 했다.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형은 내게 가까운 직업 센터에 가서 직장을 잡아보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직업 교육도 무료로 시켜주니까 마땅한 것이 있으면 배우라고 했다. 나는 직업 센터에 가서 보험회사나 일반 회사의 평사원 자리가 있는지 알아보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니 갑자기 미국에 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계속> 글=올림 출판사

2009-11-16

[OC] [강석희 어바인 시장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40] 미국 경제발전에 도움 될것이라는 기대로 민주당원임에도 불구하고 한미FTA 지지

-한미 FTA 나는 왜 찬성하는가 한국은 전쟁을 겪은 후 폐허더미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다. 북한보다도 국민소득이 낮았던 나라가 지금은 세계 11번째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삼성의 첨단산업은 이미 세계 1위에 올라 있고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는 유럽의 BMW나 렉서스를 능가하는 최우수 승용차로 평가받고 있다. 휴대폰 개발은 미국보다 4년 정도 앞서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한국의 잠재력에 대해 큰 확신을 갖고 있다. 정치 면에서 보더라도 한국의 잠재력은 대단하다. 미국은 민주주의 역사가 230년을 넘어선 나라다. 한국은 군사정권을 끌어내리고 민주화를 이룬 역사가 2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의 민주화 발전 과정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다. 내가 한국을 떠나올 때의 그 서슬 퍼렇던 유신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인권 상황 정치적인 자유 언론의 자유는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닌가. 물론 아직도 정당 공천 문제 등 개선되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지만 선거 때마다 새 정치인들이 대거 수혈되면서 미국보다도 더 빠르게 정치적인 혁신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작은 나라에서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한국인들은 세계 어디에 가도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각 분야에서 한국의 발전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한국인이 자랑하는 특유의 창조성과 추진력에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인의 교육열을 언급하면서 미국 학생들도 한국 학생들처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말할 정도가 아닌가. 나는 그런 한국이 자랑스럽고 또한 내가 그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낀다. 나는 미국 민주당원이다. 그러나 미국의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당적을 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공화당 민주당을 따지지 않고 어바인 사회를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힘을 합쳐 일한다. 시의원이 되기 전에는 한미민주당협회 회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내가 민주당 당원이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의 입장을 거들어 민주당이 반대하는 한미 FTA 통과를 위해 한인단체들의 연합 모임에 참여하고 비준 촉구 서한에 서명해서 연방 의회에 보내기도 했다. 나는 한미 FTA가 조속히 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으로서도 지금의 경제 난국을 헤쳐나가는 데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한미 FTA 통과 지지 대열에 참가한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코리안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미국의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좋은 촉매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고 미약하나마 한국 정부를 돕는 일이며 두 나라의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윈윈 전략'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두 나라가 당장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기보다는 최적의 공익을 위해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양보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앞으로 나의 정치적 행보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나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라.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다. 그분이 나를 지금까지 준비시켜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내가 어떠한 길을 가든지 간에 변치 않을 마음이 있다. 그것은 미국 한인사회를 위해 나의 조국 한국을 위해 내가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힘닿는 데까지 노력할 것이란 각오다.〈계속> 글.사진=올림 출판사

200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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